박노해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박노해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작성일 : 10-10-21 18:57
[작가와의 대화 5] "혁명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글쓴이 : 나 거기에 (59.♡.38.206)
조회 : 13,394  

<나 거기에 그들처럼>展 마지막 작가와의 대화 시간입니다.
이렇게 바쁜 10월, 
회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분들이 찾아온 작가와의 대화에는

살얼음 현실을 뚫고 온 젊은 친구들부터 각계각층의 다양한 분들이 

처음 본 시인에게 인생을 묻는 날이었습니다.

시인의 회초리 같은 이야기이자, 보듬어 위로의 노래가 되는
그 뜨거운 현장을 전합니다.

 

 

IMG_5492.jpg    


다 아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느 바닷가 백사장에 고깃배 옆에 느긋이 누운 채로
그 아름다운 해변가로 젊은 글로벌 CEO 분들이 휴가를 오신거에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을은 모든게 아름답고 좋은데 사람들이 너무 게을러서 탈이야."
그러면서 어부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왜 오늘은 고기를 더 잡지 않는거요?"
그러자 어부들이 "우리는 아침에 다 잡았소"


(CEO)"오늘 날도 좋고 파도도 고요하고 
햇볕도 좋은데 좀 많이 잡지 왜 잡지 않는거요."
(어부)"우린 잡을만큼 잡았소. 더 잡아서 뭐하게요?"
(CEO)"고기를 더 잡아야만 큰 배를 살거고 
한 척 두 척 모아서 큰 선단을 거느려야죠."
(어부)"그렇게 해서 뭐하게요?"
(CEO)"우리처럼 열심히 일한 다음에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는 거죠"
(어부)"지금 우리가 뭐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정작 어부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준비를 합니다.
취업준비만 하는게 아니라 유치원 때부터 내달릴 준비를 하죠.
맘껏 잠자고 뛰놀고 대자연의 대지를 달리면서
우정을 쌓아야 할 시기에 삶을 유보시키고 초등학교 때부터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로 길러지죠.


광화문과 세종문화회관 지하를 오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바쁜 시간에 비지니스 미팅 하나라도 더하고, 자기 스펙 쌓아야할 시간에
여기까지 어렵게 오신 분들은 다 자기 마음 속에 선함과 의로움이 피어나는 분들 같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심은 비교경쟁과 순위를 매기는 칼날같은 평가의 시선들 의식하지 마시고
우리 마음 속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시인께서 '길을 잃은 시대' 라고 하시는데, 
지금 이 시대가 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요즘 20대 젊은이들보고 패기도 없고 젊음다움도 없고 
비루하게 살아간다고 기성세대 분들이 뭐라고 하는데 저는 그럴때마다 분노합니다. 
지금 세대는 네 가지 굴레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지구화된 사회양극화 구조이고, 
두번째는 난무하는 지식으로 인한 의식의 혼란입니다. 

더 무서운 두 가지는 뭔지 아시나요? 
셋째는 현대문명 자체입니다. 일상이 거의 식민지처럼 변했습니다. 
우리는 속도와 소비와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만들어버린 
숨막히는 시장만능 시스템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내가 청주까지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목숨걸고 고속도로를 지나가야 합니다.


정점에 달한 비즈니스 문명, 석유 문명 시스템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진정 좋은 사회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적은 사회입니다.
요즘은 아프면 가족이나 친구가 돌봐주는게 아니라 간호사를 부르고,
간호대학 자격증 비즈니스가 생기는 식이잖아요.
삶의 자율성이 모두 돈으로 얽매여 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일자리 보장도 안 됩니다.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생산성을 높여야 하거든요.
생산성을 높이려면 자동화 시스템으로 갈수밖에 없습니다.
첨단기계가 일하면 사람은 일할 필요가 없죠
아산에 있는 삼성 LCD 공장이 상암축구장 7개 크기인데
일하는 사람은 350명 밖에 안 됩니다.


4대강 공사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요?
지금 4대강에서 중장비가 일하지 청춘남녀들이 일하나요?
우리는 헛된 거짓희망을 넘어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무서운 건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입니다.
대학,시장, 국가라는 거대한 억압의 삼각동맹 시스템이 우리를 유치원 때부터 몰아세웁니다.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지요. 삶에서 진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많은 사람인데 시간이 많을수록 초조하고 불안해지죠.
비교경쟁해야되고 심지어 외모경쟁까지 하고 이 도시의 전쟁 속에서
첨단무기인 명품 백이라도 들지 않으면 도저히 싸보여서 다니지도 못하고,
자기가 가진 물건으로 스스로가 저렴하지 않다는 걸 입증해야 되고...
이건 정말 폭력적인 시스템입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관심에만 사로잡혀 남을 돌아볼 틈도 여유도 사라져 버렸어요.


자유를 향해 탈주하고 싶어도 이미 스스로의 안에서 사전검열되고
자기 중심주의의 덫에 갇히고 단군이래 가장 지식이 많은 세대이기 때문에
지식의 덫에 자꾸 굴러떨어지게 되는거죠.
하다못해 어느 종교나 대학 소속 아니면, 유학 자격증 없으면 불안해 합니다.


우리는 네 가지 덫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잘살고 선진화가 되기 위해서는
질주해야 한다고 확신을 갖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하십시오.
현실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자기 첫마음이고 꿈이고 이상입니다.
현실처럼 빠르게 변하는게 어디있나요? 현실처럼 비실제적이고 비실질적인게 어디 있나요?
오히려 이상과 꿈이, 지금 보기에는 추상적이고 미친 소리인 것 같지만 가장 현실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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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힘든 나라를 많이 다녀오셨는데 가장 감동하셨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한 장 한 장이 다 감동인데 어떻게 얘기하죠? 대신 제 심장의 박동을 드리겠습니다.
40만 명이 쓰나미로 한꺼번에 죽은 반다 아체나,
날마다 폭격이 진행되는 팔레스타인, 쿠르디스탄, 이라크...
이런 곳에서 참 신기한걸 봤어요. 자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강력한 생의 의지죠. 특히 부끄러웠던 것은 정치적 고아들에 대한 겁니다.
아버지와 형이, 누나가 저항 게릴라로 활동하다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인데,
마을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눔문화에서 창조적 나눔실천을 하기 위해
현지에서 자급자립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나눔이 뭘까...
이런걸 주민들과 끝없이 논의합니다.


저는 어느 지역에 가든 원칙이 있는데요.
아이들과 여자들까지 다 회의에 참석시키라고 합니다.
무슬림은 원래 남자들끼리만 회의를 하려고 하는데 제가 몇 시간을 우겨서 관철시키거든요.
그리고 자꾸 여자들에게 발언기회를 줍니다.
나중에는 남자들이 큰 절을 하며 말하더라고요.
"제가 10년 동안 제 아내와 살아 왔지만 제 아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식견이 뛰어난지 몰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을회의가 여성들도 참석하는 문화로 굳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서 저도 모르게 "아이들 고아원을 어디에 짓죠"라고 하니까
여성 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니 샤이르 박, 코리아는 마을에서 부모가 죽고 
형제자매도 없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냅니까?
고아원이 있는 사회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돈이 없고 폐허더미에 천막을 치고 살지만 
이 마을 아이들은 우리가 키웁니다."
하며 분노를 하시는겁니다. 이런게 바로 인간의 위엄과 품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제가 새로 펴낸 시집에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으니 한번 보시죠...
너무 책 티저광고 같나요? (웃음)"


오늘 광주에서 시인을 만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사진이 참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사진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사랑한만큼 보입니다.
사진이 어떻고, 미술이 어떻고, 바로크 양식이 어떻고...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앎에 걸려 넘어지지 마시고 가슴으로 보시면 됩니다.


흑백사진을 찍게 된 이유와 흑백과 컬러 사진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세상이 너무 현란하기 때문에 색이 그 사진속으로 깊이 들어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사람은 궁할 때 궁리하게 되고 통하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결핍할 때 간절한 창조가 나옵니다.

도구가 단순할 수록 그 현장의 사람들 삶 속으로 다가가야만 합니다.
뭐든지 물질적으로 풍부하면 생명력은 시들어 버립니다.
흑백을 가만히 보면 흑백에는 수많은 명암이 있고, 
검정과 하얀색 속에서 찬란한 사물의 본래의 색깔이 있습니다.
만약 세상이 차분해지고 고요할 때 저는 칼라 사진을 찍게 되겠지요.
그런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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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온실 속에서 부모님 보호 아래서만 자라온 스무살 입니다.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부모님 도움 아니면 학교도 못 다닙니다.
사진 속의 아이들 모습을 보며 많이 부끄러웠어요.
새벽부터 나무를 해서 시장에 파는 소녀나 
폭격더미에서 살아남은 샤나 살흡 앞에서 '나는 불구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까..

용기를 가지고 살아낼 수 있을까..
이런 젊은이들에게 용기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명박산성보다 더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부모산성이라고 하죠? (웃음)
경제성장의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던 세대가 물려준 넘치는 풍요가, 
젊은 세대들에게 오히려 독소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부모들이 지금 우리 아이들을 애완견으로 만들었습니다.
저에게 찾아온 대학생들 열에 여덟아홉이 아직도 아이 목소리를 냅니다.
나이가 스무살이 되었는데.. 부모에게 단 한번도 아이 목소리를 
지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더 무서운건 이제는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책도 다 골라 줍니다.
386세대 중에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부모가 자녀를 저한테 데리고 옵니다.
그러면 제가 '너 참 인생 힘들겠다'고 얘기합니다.
좋은 책도 부모님이 골라주고 좋은 말도 생각도 체계적으로 주입시켜 주니까요.


그런데요. 생명은 버티고 반항하는 힘이 있어야만 자기만의 힘이 생깁니다.
'등용문'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폭포에서 잉어가 거슬러 올라갈 때 생명력이 생겨서 펄떡이는걸
용문이라고 하거든요. 거스르지 않으면, 버팅기지 않으면, 실패하고 저질러보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내면에 차오르는 힘이 생깁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님들이 전부 쥐어짜서 아이들 유학은 다 보냅니다.
부모속에 당신의 적이 들어있습니다.
낡은 세대가 당신의 부모속에 들어있습니다.
조금은 가슴 아프게... 쓸쓸하게.. 부모와 싸워 넘어서야 합니다.
자기 길을 찾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어릿광대가 되고 맙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식에게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고 져주는 겁니다.

내 가슴에 시인이 살아있지 않으면 젊음이 아닙니다.
반항아가 살아있지 않으면 젊음이 아닙니다. 
탐험가가 살아있지 않으면 젊음이 아닙니다.


그대는 인류가 부러워 하는 스무살 청춘입니다.
그런데 자기 가슴안에 혁명가가 살아있지 않는다면...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미 그대의 젊음은 지나가버렸음을..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요?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법등명 자등명'이란 말을 쓰는데요.
오직 '진리의 등불에만 의지하고 너 자신에만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생각합니다.
제가 세계지역을 다니며 사막을 가다 낙타가 쓰러지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모래바람 하붑이 몰아치는데 낙타 떼가 1천마리, 2천마리 행렬이 지나가요.
사막을 걷는 낙타는 일생 동안 푹푹 빠지는 모래더미를 자기 몸에 진 짐의
무게로 한 걸음도 건너뛰지 않고 묵묵히 걸어갑니다.


줄지은 낙타 행렬에서 한 마리가 이탈해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겁니다.
자기 최후를 직시하고는 자기의 사막 지도가 되었던 물 냄새나는 나일강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겁니다. 그 순간 낙타를 몰고가던 몰이꾼 청년도
낙타들의 행렬도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떠나는 낙타를 바라보죠.


떠나는 낙타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일생동안 쉼없이,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수천킬로 사막을 함께 걸었던 
정든 동료들을 바라본 뒤에 몇걸음 더 가다가 거인의 최후처럼, 

자기 사명을 다한 자처럼 서서히 쓰러져 갑니다.
한 청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린 다음 무리들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그렇게 사막에 가면 낙타가 죽어서 남긴 흰 뼈 이정표가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저는 세상에 업적을 남기는데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 들고갈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그 분들께 바쳤던 

제 무력한 사랑, 상처난 마음, 그것 하나 딱 가져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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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20대 대학생인데요. 시인님께서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보이셨는데
저는 제가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사랑하는 순간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길 때라고 미뤄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타인을 위해 사랑하고 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누구를 위해 울어본 적도 없고, 누구를 위해 희생해본 적도 없습니다.
단 한 번 뿐인 제 삶을 저답게 잘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그 분을 위해 울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저 자기를 찾아 자기답게 사세요.
누구를 위해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면 반드시 보상을 바라게 돼요.

사랑은 누구를 위해 짜내려고 하면 안 나옵니다.


제가 물 한 모금 마시고 책 하나 펴내고 커피 한잔 마시는데
50개국 이상의 노동력이 들어갑니다.
세계 밑바닥에서 인류를 떠받치며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노동을 하며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게 누구입니까?
우리 첨단 반도체와 아이폰 먹으면서 살 수 있나요?
농사지은 밥으로 먹고 삽니다.
우리는 살아가는게 아니라 살려지는 존재입니다
.
그렇기에 누구를 위해 울어주겠다는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를 우십시오. 가능하면 크게 우십시오.
그러면 나와 남이 떨어져 있지 않은 존재라는 걸 아실겁니다.
사람은 다 영혼을 가진 존재잖아요.
소득 3만 달러 만들어준다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죠.
자기 영혼에 충실하면 됩니다.


사람은 물질적인 결핍에 대해선 금방 적응합니다.
50평 짜리 집에서 살다가 30평 이사가면 처음에는 불편해도 다 적응합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이 편하지 않을때,
자기 영혼과 불화하는 건 결코 적응이 안 됩니다.
여기에 적응하는 순간 그 존재는 이미 끝난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리 미욱한 사람일지라도
물질로 굴복시킬 수 없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힘이 살아있음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오신 분들에게 헌시를 바치며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마쳤습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수록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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