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노을녘에 종려나무를 심는 사람
Man planting a palm tree at sunset, Sudan, 2008.

누비아 사막에 석양이 물들면 하루 일을 마치고 종려나무를 심는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치면 말라 죽고 다시 심으면 또 말라 죽어가도 수단 사람들은 날마다 모래둑을 북돋고 나일 강물을 길어다 종려나무를 심어간다. 사막의 수행자처럼.

나일 강이 시작되는 타나 호수
Lake Tana, where the Nile begins, Ethiopia, 2008.

에티오피아 고원에 위치한 바다처럼 드넓은 타나 호수로부터 청나일 강이 발원한다. 청나일 강은 백나일 강과 만나 누비아 사막을 적시고 비옥한 땅을 만든다. 아프리카 사막의 젖줄 타나 호수에 여명이 밝아오면 에티오피아의 어부들은 전통방식 그대로 파피루스를 엮은 탕크와를 타고 은빛 물고기를 잡아 올린다.

에티오피아의 영성
Spirituality of Ethiopia, Ethiopia, 2008.

수도 아디스아바바 성당에서 열린 일요 미사.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는 그리스도교 양식이지만, 양손을 위로 받드는 것은 이슬람식 ‘두아’(기도)이고, 찬송하며 치는 박수는 아프리카 토착 리듬이다.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 있지 않아요. 여기 검은 땅 낮은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어요.

다시 씨앗을 뿌리기 위해
To sow seeds again, Ethiopia, 2008.

에티오피아인의 80%는 농사가 주업이지만 오랜 내전과 산림 황폐화와 잦은 가뭄으로 2003년 이전까지 유엔의 식량원조를 받아야만 했다. 기아참사를 뚫고 나온 에티오피아인들은 힘찬 야생의 몸짓으로 황폐한 땅을 갈아 나가며 다시 희망을 씨 뿌리고 있다.

노래하는 시미엔 산맥 길의 아이들
Children singing on the Simien Mountain roads, Ethiopia, 2008.

걷기조차 힘든 해발 4천 6백 미터 시미엔 산맥 길에서 어디선가 맑고 높은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제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나뭇짐을 이고서 30킬로미터를 걸어오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 희망은,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만큼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노래해야 걸어온다는 듯이.

에티오피아의 아침을 여는 '분나 세레모니'
The Ethiopian morning starts with a 'Bunna Ceremony', Ethiopia, 2008.

에티오피아의 모든 아침은 집집마다 향기 그윽한 ‘분나 세레모니’(커피의례)로 시작된다. 무쇠판에 커피콩을 볶고 나무절구에 빻아서 천천히 끓여내는 것은 젊은 어머니가 주재한다. 할머니는 볶은 보리를 나눠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잔은 우애의 잔. 두 번째 잔은 평화의 잔. 세 번째 잔은 축복의 잔. 가족들은 세 잔의 분나를 마시고 포옹을 나누며 해 뜨는 대지의 일터로 떠난다.

내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다
Every beautiful thing has its own place, Ethiopia, 2009.

오늘은 새해 아침. 물을 길으러 높은 산맥 길을 걷는 어머니와 그 뒤를 따르는 아들의 발걸음이 산정을 울린다. 자신이 살아가는 땅을 조금도 망치지 않고 가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저 강인한 삶의 행진에 여명이 밝아온다.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Turning the head towards home, Sudan, 2008.

목화는 옷감뿐만 아니라 지폐, 의료 솜, 치약, 식용유 등에 널리 쓰여 ‘백색 금’이라 불린다. 수단 노동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목화 농사로 살아가지만 미국의 인위적인 저가 공세에 밀려 제 값을 받지 못한다. 두 달째 낯선 땅에서 이주 노동을 하던 여인이 두고 온 가족이 그리워 고향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건기의 목화 수확
Cotton harvest in the dry season, sudan, 2008.

땅이 쩍쩍 갈라지는 불볕 아래 전통의상 톱을 입고 검고 마른 손으로 하얀 목화를 따는 수단 여인들. 건기에 피어나는 목화 솜은 포근하지만 그 꽃받침은 손가락을 벨 정도로 날카롭다. 충분히 피어난 꽃만을 일일이 골라 따야 하는 고된 노동. 하얀 솜으로 짜낸 직물에는 그녀들의 핏방울이 스며 있다.

뜨거운 하붑이 지나가면
After a hot haboob passes, Sudan, 2008.

거대한 모래폭풍인 하붑이 지나가면 농부들은 논밭에 쌓인 모래를 거둬내고 말린 낙타똥을 빻은 거름을 뿌린 뒤 나일 강물을 끌어와 토지를 적신다. 흰 잘라비를 입은 농부들은 원망도 불평도 없이 올해는 올해의 씨앗을 뿌려간다.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듯이.

수단의 어머니
Sudanese mother, Sudan, 2008.

무슬림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수단은 반미 노선을 견지해온 ‘아프리카의 자존심’으로 불리운다. “나는 수다니입니다.” 모래바람 치는 길에서 만난 어머니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와 악수를 청하더니 자기 집에서 차 한잔하고 가라며 손을 이끈다. 키도 말씨도 마음씨도 시원시원하기만 하다.

나일 강가의 저녁 기도
Evening prayer on the Nile, Sudan, 2008.

나일 강에 붉은 석양이 내리면 이 땅의 사람들은 저문 강에 얼굴을 씻고 네 번째 기도인 마그립을 올린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아는 나일 강처럼 나 또한 나의 길을 굽힘 없이 흘러가리라 다짐하면서.

나는 여기 살아 있다
I am alive here, Sudan, 2008.

모래폭풍을 뚫고 살아남았다. 45도의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나를 보호해 줄 것은 작은 돌담 하나. 그마저 하붑이 쓸어가 버렸어도 나는 이 자리에서 나를 지켜가며 끝내 푸른 잎을 휘날리리라.

천오백 년 된 우물에서 생명수를 긷다
Drawing the water of life from a 1,500 year-old well, Sudan, 2008.

이 사막 우물은 깊이가 무려 90미터나 된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두레박을 끌어 올릴 수가 없어서 당나귀에 줄을 매어 사람이 함께 달리며 물을 길어 올린다. 양가죽 두레박에 차가운 물을 길어 올리면 낙타들이 먼저 먹고 그 다음 당나귀들이 먹고 양떼들이 먹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오가며 고생한 순서대로.

다르푸르의 아이
Darfur child, Sudan, 2008.

가족을 잃은 다르푸르 아이들은 지금 소년병이 되어 연필 대신 총을 쥐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피가 흐르는 길을 걸어 할머니와 함께 낯선 땅을 떠도는 다섯 살 아흐마드. 학살당한 부모님이 걸어준 목걸이를 하고 있는 눈동자는 한꺼번에 세상을 다 보아버린 눈빛이었다.

내일은 둥글다
Tomorrow is round, Sudan, 2008.

아침 해가 떠오르면 엄마는 일터로 나가고 아빠 없는 다섯 형제는 축구를 하며 논다. 흙먼지 날리는 빈민가의 작은 공터지만 아이들은 공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도 슬픔도 스스로 이겨낸다. 공은 둥글고 내일은 둥글기에.

걷는 독서
Reading whilst walking, Al Jazeera, Syria, 2008.

근대의 묵독 이전의 낭송 전통으로 걷는 독서. 눈 덮인 자그로스 산맥을 달려온 바람은 맑다.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입 맞추며 오래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선조들의 복장과 걸음과 음정 그대로.

바그다드 가는 사막 길의 말라 죽은 오렌지 나무
The parched orange trees on the desert road to Baghdad, Syria, 2007.

이라크 국경으로 가는 시리아 사막 도로.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함신(뜨거운 모래폭풍)이 공습처럼 몰아쳐 오고 갓 심어진 오렌지 나무는 울부짖듯 검푸른 잎을 날리고 있었다. 2007년 다시 와보니 내 키를 넘게 자란 나무는 말라 죽어 있었다. 모래바람 치는 사막에서 오렌지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강제로 이식되는 것은 살아남기 힘들다. 중동에 강제로 심어진 저들의 민주주의처럼.

시르야 디즐라(티그리스 강이여 흘러가라)
Sireuya Dijlah (Flow River Tigris), Syria, 2008.

터키와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을 휘감아 흐르는 티그리스 강의 상류 쿠르디스탄(쿠르드인의 땅). 이 강을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생겨났고, 길가메시 서사시와 도시와 성문법이 생겨났고, 인류의 진보는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지금 3천 5백만 지상 최대의 소수민족인 쿠르드인들은 자기의 땅에서 지워져 가며 ‘중동의 눈물’로 떠돌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농부
A farmer on the banks of River Euphrates, Syria, 2008.

여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알 자지라’(섬) 대평원.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 유프라테스 강물을 받아 씨앗을 뿌린다. 수렵채집의 생활에서 인류 최초의 농경 시대를 열었던 5천 년 전 관개농법이 기적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슬픈 비밀공연
A secret performance, the saddest on Earth, Kurdistan, Syria, 2008.

한밤중, 번득이는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흐린 불빛 속에 벌어진 쿠르드 아이들의 전통공연. 단 한 명의 관객인 나를 앞에 두고 감춰둔 전통복장을 꺼내 입고 금지된 모국어로 노래하고 춤추는 시리아 사막의 무릎 꺾인 어린 낙타들.

수장될 위기에 처한 8천 년 된 하산케이프
8,000 year old Hasankeyf, at risk of being buried under water, Turkey, 2006.

인류 문명의 자궁인 티그리스 강의 상류 하산케이프 다리. 아나톨리아 고원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에서 문화 교량의 역할을 해왔으며 고대 수메르 문명과 로마, 오토만 제국의 문화 유적이 가득하다. 8천 년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하산케이프는 쿠르드인의 오래된 삶의 자부심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 유산이고 영감의 원천지인 하산케이프는 지금 서서히 수장되어 가고 있다. 터키 정부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로 흐르는 생명수인 티그리스 강을 막아 중동의 수자원을 확보, 통제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거대한 일리수 댐을 완공해 2006년 3월부터 물을 채우고 있다.

지상의 둥근 빵
Round bread on Earth, Turkey, 2005.

쿠르디스탄은 중동 최대의 수자원과 석유자원을 간직한 땅이다. 그러나 이 기름진 대지에서 70%가 실직자고 70%가 휴경지다. 쿠르드인들은 2등 국민으로 가난과 차별을 받고 아이들은 구두통과 껌과 티슈를 들고 거리를 떠돈다. 그럼에도 쿠르드 마을 어디서나 낯선 이를 보면 빵과 차를 들고 가라며 손을 잡아 이끈다.

폭격더미에서 살아나온 사나 샬흡(13세)
Sana Salhub (13), emerged alive from the bombing debris, Lebanon, 2006.

레바논 남부 까나 마을 집단학살 현장. 건물 지하실로 대피한 마을 사람들 중 65명이 사망했고 그 중 35명이 아이들이었다. ‘A Plane VS A Child’(전폭기 대 아이들). 까나 마을 어린이 대학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은 인류의 눈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폭격더미에서 살아나온 사나 샬흡은 하루아침에 부모와 언니와 오빠와 집을 잃고 혼자서 어린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광야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여인
A Palestinian woman driven out of her homeland in the wilderness, Palestine, 2005.

광야의 자기 집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여인이 울며 걷는다. 수천 년 살아온 평화로운 마을에 총성이 울리고 이스라엘 탱크와 방탄차들이 휩쓸고 간 뒤에는 어김 없이 분리장벽이 세워지고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선다. 팔레스타인 영토와 귀중한 수자원을 영구 독점하려는 시도이다. 이 신성한 ‘태양의 광야’(라Ra 광야)에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향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 유민流民으로 떠돌고 있다.

빵을 구하러 가는 남매
A brother and sister off to look for bread, Lebanon, 2006.

몇 번이나 체포되고 억류되며 찾아간 스로빈 마을. 어른들은 부상과 탈진으로 망연자실인데 아이들은 참으로 놀라운 존재이다. 공포와 절망의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울고, 가장 먼저 웃고, 그 어떤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가파른 비탈길을 앞장 서 올라가고 있으니.

전사한 형의 사진 앞에서
In front of their dead brother’s photo, killed in combat, Palestine, 2005.

‘한 집 건너 학살 가정, 한 집 건너 전사 가정’ 나블루스 발라타 난민촌은 집집마다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난민촌 형제들은 어디서나 서로 손을 꼭 잡는다. 언제 서로 떨어질지, 언제 영영 사라질지, 한 번이라도 더 품에 안고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잡는다.

광야의 길
Road in the wilderness, Palestine, 2005.

수많은 예언자들이 걸어온 광야. 예수가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며 세 번의 유혹을 이기고 걸어 나온 광야. 광야는 저항과 영성의 처소. 다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나 거기에 그들처럼≫ 사진집

<나 거기에 그들처럼> 온라인 전시 작품 60점을 포함한 160점의 사진이 담겨있다. 박노해 시인이 직접 쓴 시와 같은 사진 설명 글이 한 권의 책보다 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오래도록 소장할수록 가치가 빛나는 책. 사진집의 수익금은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쓰인다.

구름의 계단밭
Terrace farms in the clouds, Yunnan, China, 2007.

‘구름의 남쪽’이라 불리는 윈난雲南. 거대한 암석 지반에 세워진 석두성 마을에는 층층으로 쌓아 올린 계단밭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대대로 이어온 끈질긴 인간의 노동은 험난한 고원 비탈에 장엄한 삶의 터무늬地紋를 새겨 놓았다.

반둥의 휴화산
Dormant volcano in Bandung, Indonesia, 2005.

냉전 시대인 1955년, 이곳 반둥에서 기나긴 식민주의 종식과 제3세계의 단결을 위한 역사적인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최초로 열렸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은 세계의 모순을 안다는 듯 반둥의 휴화산은 이글거리는 용암을 품고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절망의 바닥을 친다
Hitting the bottom of despair, Indonesia, 2005.

쓰나미가 휩쓸기 훨씬 이전부터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강제 점령되어 30여 년 동안 정치적 탄압으로 고통 받아왔다. 그늘 한 점 없는 무너진 집터에서 청년은 홀로 망치질을 계속한다. 절망의 무게로 절망의 바닥을 친다는 듯이.

계단밭을 오가는 마을 문
Village gate going to and from the terrace fields, Yunnan, China, 2007.

석두성은 대지가 높아 공기도 물자도 희박하다. 마을에서 계단밭으로 오르내릴 때는 등짐을 진 여인도, 삽을 든 남정네도, 당나귀도 누구나 성문에 앉아 숨을 고른다. 숨가쁜 일상에서 잠시 기대 앉아 깊은 숨을 고르는 환한 자리 하나.

나루터의 여인
Ferry Ladies, Vietnam, 2006.

메콩 강은 베트남어로 ‘어머니 강’을 뜻한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해 버마, 라오스, 타이,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힘차게 흘러간다. 울창한 나무터널의 메콩 강 지류는 미국의 침공에 맞서 베트공들이 게릴라전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다. 전쟁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베트남의 미소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의 강인함에서 피어난다.

인도의 할머니와 소녀
An Indian girl and her grandmother, India, 2006.

난생 처음 수도 뉴델리로 여행을 온 할머니. 수확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과 버스를 세내서 고향으로부터 출발한지 열흘 걸려 도착했다. “인도에서 가난한 여자로 산다는 건 카스트 위에 또 하나의 카스트를 이고 사는 거야. 하지만 내 손녀에게만은 내가 물려 받았던 이 굴레들을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아.”

몽골 초원의 게르
Ger in the Mongolian grassland, Mongolia, 2005.

몽골 초원의 게르에서 양을 치며 4대를 이룬 할머니. 내일이면 다시 천막을 접고 떠날 채비를 한다. “누구든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이 초원은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말아. 우리 모두는 영원한 거처를 지은 자가 아니라 이 땅에 한 시절 천막을 친 자이니까.”

초원에서 빈민가로 내몰린 가족
A family chased from the grasslands to the slums, Mongolia, 2005.

값비싼 캐시미어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몽골 정부가 풀뿌리까지 캐먹는 염소 방목을 장려하자 몽골 초원이 황폐화되고 사막이 늘어간다. 대대로 초지면적당 동물의 제한 숫자와 다양한 종을 지켜오던 유목민의 전통윤리는 경제논리에 무너져 간다. 양떼를 잃고 수도 울란바토르의 빈민가로 내몰린 사람들. 아버지에게는 돌아 나갈 초원이 없는데 아이에게는 딛고 나갈 무엇이 남았는가.

안데스 고원의 들녘
The fields of the Andean highlands, Peru, 2010.

안데스 고원에 건기가 시작되면 수확을 하는 원주민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연노랑빛 귀리와 진노랑빛 보리 연초록빛 알팔파와 진초록빛 따루이 적갈색빛 끼누아로 눈부시게 빛나는 들녘은 대지를 화폭 삼아 노동으로 그려낸 거장의 작품만 같다.

리마의 상징인 십자가상 뒤편
Behind the crucifix, symbol of Lima, Peru, 2010.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리마를 건설한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승리를 자축하며 저 높은 산정에 세운 거대한 십자가상. 십자가 그림자는 저 낮은 빈민가로 임한다. 이 땅의 원주민들은 식민지배가 뿌려 놓은 인종차별과 가난의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살아간다

끄리스토발 언덕의 빈민 마을
A poor town on the Cerro San Cristobal, Peru, 2010.

페루의 수도 리마의 달동네 산 끄리스토발. 자기의 땅에서 뿌리 뽑혀 나온 원주민들은 거친 비탈에서 서로 어깨를 기대며 산다. 채색한 집들의 화려함 속에 슬픔을 감추고서. 세계 어디서나 가난한 사람들은 밀리고 떠밀려 가장 낮은 늪지나 가장 높은 달동네에 산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
Children’s only playground, Peru, 2010.

“축구도 하고 싶고 달리기도 하고 싶어요.” 70여 명의 아이들이 사는 가파른 산동네에는 평평한 공터도 없고 나무 한 그루도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와 무거운 물통을 들고 수백 개가 넘는 아찔한 계단 길을 걸어 집안일을 돕는다. 원주민 아이들의 앞길엔 비탈만 놓여 있지만 그래도 심장은 강인하고 우정만은 단단하다.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
Gracias a la vida, Peru, 2010.

오늘은 두레 노동을 하는 날. 안데스 고원의 감자 농사는 숨가쁘지만 옥수수 막걸리 치차를 돌려 마시며 잠시 만년설 바람에 땀방울을 씻는다. 힘들 때 서로 기대는 인정이 살아 있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살아 있기에 거친 일터에서도 젊은 남녀의 노래 소리와 풋풋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쁨이 없고 노래가 없는 노동은 삶이 아니지요.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 내 삶에 감사합니다.”

아픈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소녀
Girl who takes care of her sick grandmother, Peru, 2010.

일곱 살 난 안젤라는 산 위의 마을에 산다. 아픈 할머니를 모시고 의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안장이 있는 말에는 할머니를 태우고 안젤라는 이제 막 길들이기 시작한 말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가파른 해발 4천 5백 미터의 감자 수확
Potato harvest at 4,500 meters, Peru, 2010.

안데스의 농부들은 세계에서 가장 험한 지형에서 감자를 심고 알파카를 치며 8천 년을 살아왔다.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비옥한 땅을 빼앗기고 해발 4천 5백 미터 만년설산까지 쫓겨 올라왔지만 오늘도 청정한 안데스의 품에서 비탈밭을 일구며 자급자립하는 삶을 강인하게 이어간다.

나의 친구 푸스카
My friend phusca, Peru, 2010.

수줍게 미소 짓던 처녀가 푸스카를 들고 실을 잣는 순간 선조들과 이어진 내면의 끈을 느끼는 듯 고요히 침잠한다. “여섯 살 되던 때에 할머니로부터 작은 푸스카를 선물 받았어요. 어깨 너머로 실 잣는 법을 배운 뒤 우린 늘 함께였죠. 실을 자을 때면 모든 고통과 슬픔이 사라져요.”

어린 가장
Young breadwinner, Peru, 2010.

로니 일레메는 열한 살이다. 일찍이 아빠를 잃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물려 받은 낡은 시계 속에서 아빠를 느낀다. 알파카를 치고 돌담을 쌓고 엄마를 도우며 벌써 가장의 몫을 꿋꿋하게 해나간다.

옥수수를 수확하는 여인
A woman harvesting corn, Peru, 2010.

옥수수는 감자와 더불어 안디노스의 중요한 식량이다. 잉카 제국의 황제가 태양신에게 바쳤던 자줏빛 옥수수 술 치차 모라다는, 지금도 신성한 음료로 여겨져 농민들은 밭에 뿌리는 의식을 행하며 풍년을 기원한다. 한 알의 종자에서 수많은 옥수수 알이 재생되듯 신성한 씨앗을 품은 대지는 많은 수확물을 올해도 선물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이 있는 마을
Crucifix village, Peru, 2010.

스페인 정복군은 칼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이 땅에 왔다. 1540년, 그들은 잉카의 마지막 왕과 저항하는 잉카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하고, 잉카 사원을 파괴한 위에 웅장한 성당을 세우면서 약탈한 황금으로 치장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강제로 세워진 십자가에서도 자신들을 구원할 ‘안디노스 예수’를 창조해냈다.

끼누아를 고르는 볼리비아 농부
Bolivian farmer picking quinuas, Bolivia, 2010.

끼누아는 고원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나 안데스 원주민들의 스프와 빵이 되어 밥상에 오른다. 끼누아는 지상의 곡식 중 가장 좋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어 우주 비행사의 식량으로도 쓰이는 값진 곡물이다. 만년설 바람의 키질에,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은 쌓인다.

갱도 입구의 광석 추출
Ore Extraction at the entrance of the tunnel, Bolivia, 2010.

중남미 최대의 광물자원 부국인 볼리비아는 서구 자본의 수탈과 백인 정권의 부패로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남미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어머니 대지는 우리에게 광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것을 훔쳐갔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되찾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광산과 석유와 가스의 생산지를 국유화시키고 있다. 벼랑 끝 갱도 입구에서 광부 가족이 광석을 추출한다. 첨단 전자제품과 우주 비행선에 쓰이는 이 광석들은 이렇게 일일이 망치로 깨고 손으로 빻아서 생산된다.

서른 다섯 여자 광부의 죽음
Death of a 35-year-old female miner, Bolivia, 2010.

그녀의 나이는 서른 다섯.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간다. 머리를 조이던 헬멧도 벗어 놓고 손목을 울리던 망치도 내려 놓고. 소녀 적부터 광부이던 그녀는 일생 동안 수많은 금과 은을 캐왔지만, 그녀의 몸엔 금반지 하나 은팔찌 하나 없다. 가족과 동료 광부들은 주검을 식탁 위에 뉘여 놓고 마지막 가는 길에 꽃 한 송이도 올리지 못한 가난의 슬픔을 이겨내느라 코카 잎을 나눠 씹으며 소리 없이 흐느낀다.

안데스의 어머니
Mother of the Andes, Bolivia, 2010.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티카카 호수 곁의 마을에서 감자밭을 일구며 살아온 94세 어머니는 아들딸을 존경 받는 혁명가로 교사로 의사로 키워냈어도 오늘도 이 땅을 지키며 감자를 거두신다. “우리가 자유를 얻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어. 우리의 바람은 감자를 심고 거둘 땅을 찾는 거였어. 그들은 총알을 늘려 탐욕을 늘려가지만 나는 한 알의 감자를 심어 늘려갈 뿐이야. 이것이면 충분하고, 이것으로 넉넉하지.”

게바라의 길
Guevara’s road, Bolivia, 2010.

체 게바라가 총살당한 라 이게라로 가는 길. 체 게바라의 길에서는 피기침 소리가 난다. 권력과 영예로 가는 환한 오르막 길과 정의와 사랑으로 가는 어두운 내리막 길. 나는 결정의 순간마다 체 게바라의 갈림길에 선다.

께로스의 알파카 치는 소녀
Alpaca herding girl of Q’ero, Peru, 2010.

지구의 등뼈인 안데스 고원의 해발 5천 미터 가장 높고 맑고 시린 자리에 께로족이 산다. 전기도 없고, 길도 없고, 말을 타고 갈 수도 없는 곳. 잉카의 후예인 께로족은 지난 5백 년 가까이 외부와 단절된 채 고유한 삶의 방식을 지켜오고 있다.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쉬었다 가야 하는 길을 만년설산이 단련시켜준 강인한 심장을 지닌 일곱 살 셀레스티나는 알파카보다 더 빨리 아침 산정을 향해 달려간다.

께로족의 지도자
Leader of the Q’ero tribe, Peru, 2010.

5백여 년 전 스페인과 잉카의 최후 전투에서 패한 뒤 께로족은 안데스의 가장 높은 지대로 숨어 들어왔다. 하도 멀고 험준한 지형이기에 정복자들조차 이들을 찾지 못했다. 페루 사람들은 잉카 제사장 집단의 후예인 께로족에 대해 만년설산을 바라보듯 여전히 경외의 마음을 품고 있다. 일곱 개 마을로 흩어져 살고 있는 께로스인들의 족장 포르투나토(42세)는 주민들의 직접 선출로 뽑힌 께로족의 프레지덴타, 최고 지도자이다.

께로티카 아이들
Q’erotike Children, Peru, 2010.

께로티카는 께로족을 상징하는 붉은 꽃이다. 안데스 고원의 해발 4천 5백 미터 지점에서부터 피어난다. 께로스인들은 먼 곳을 다녀오다가 께로티카를 만나면 붉은 꽃을 꺾어 머리에 꽂는다. 이제 우리 집에 다 와간다고. 이 새벽, 안개 속에서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원의 대지 위에 선 께로스 아이들은 갓 피어나는 붉은 께로티카를 닮았다.

꼬차무코에 학교가 생겼어요
A new school in Cochamuco, Peru, 2010.

한 달 전 문을 연 학교는 께로 주민들이 3년 동안 모은 돈으로 목재와 함석판을 조금씩 지고 날라와 직접 지은 것이다. 학교 이름은 케츄아어로 ‘행복한 별들Cusicuoyllur’. 신명이 난 아이들은 난생 처음 선물 받은 공을 차며 어린 알파카처럼 뛰어 다닌다.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치다
Teaching the kids back home, Peru, 2010.

께로스 말로만 들어온 이야기와 지식을 글자로 써보는 것이 신기하기만 한 아이들. 도시에 내려가 어렵게 스페인어를 익힌 마을 청년 프레디(26세)는 학교 운영을 책임지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의 눈빛은 안데스 밤 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께나를 불며 만년설산을 넘어가는 귀갓길
Going home playing the Quena, while crossing the snow-capped mountain, Peru, 2010.

안데스 고원의 께나 소리는 한 맺힌 대지의 가슴에서 울려오는 것만 같다. 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뼈를 다듬어 연주했다는 잉카 전통의 악기이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는 구슬픈 께나 소리가 희미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오래된 이 삶의 풍경은 오늘도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진다.

오래된 직접 민주주의
Old direct democracy, Peru, 2010.

3개월마다 열리는 께로족의 총회 론다 컨퍼렌시아. 일곱 개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께로스인 전체가 모여 부족 공동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이다. 께로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외부인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이 날 130여 명의 남녀노소가 초원에 빙 둘러앉아 찬 비와 우박을 맞아가면서도 무려 여섯 시간 동안 회의는 계속되었다. 나이 어린 사람이건 부녀자건 모두가 발언하고 모두가 경청하고 거침 없는 토론을 통해 전원합의에 도달하는 유구한 직접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놀라운 현장이다.

내가 걷는 길
The path I walk, Peru, 2010.

오늘도 길을 걷는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곳에서 와서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힘든 발자국들은 한 줌 이슬처럼 바람에 흩어지니. 그러나 염려하지 마라. 그 고독한 길을 지금 우리 함께 걷고 있으니.

≪나 거기에 그들처럼≫ 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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